커피라고는 믹스커피가 다인 줄 알던 시절, 카페라는 곳은 원두커피라 적힌 낯선 메뉴를 걸고 믹스커피와 다른 쓴 물을 비싸게 팔던 공간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초·중반, 커피전문점과 카페라는 공간은 소위 X세대라 불리던 당시의 젊은 층을 규정하는 문화적 상징이었으며, 지금과 같은 커피문화의 기반을 다진 초석이 되었다.
페미니즘이 문화 주류로 부상하고, 이에 편승한 여대생들의 흡연이 보편화 되면서, 당시 카페는 여성이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흡연할 수 있던 유일한 공간이기도 했다. 사회 배경도 지금에 비하면 각박함이 덜했기에 카페는 낭만과 사랑을 이야기하던 젊은이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그러던 중 1999년 스타벅스가 이대 앞에 1호점을 내면서 우리나라의 카페와 커피문화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에스프레소의 대중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에스프레소코리아 역시 ‘100년의 커피상점’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세상에 첫선을 보였다.
에스프레소커피로서 국내 첫 브랜드가 탄생한 것이다. 당시 불모지나 다름없던 에스프레소 커피시장을 개척한 에스프레소코리아는 2011년 프렌차이즈 카페브랜드인 카페보니또를 론칭하면서 본격적인 오프라인 카페시장을 선도하기 시작했다.
이미 자리를 잡은 생두와 원두의 제조·유통 라인을 자신의 오프라인 매장에 직접 적용함으로써 카페보니또는 다른 어떤 카페 브랜드보다 경쟁력 있는 스페셜티커피 프렌차이즈로 성장해왔다.
세상을 향한 도전, 또 도전
사람을 나누는 흔한 방법으로 ‘주는 스타일’과 ‘빼앗는 스타일’로 구분 짓는 예가 있다. 주는 스타일은 에너지가 넘치고 매사에 긍정적이라 함께 있으면 주변 모두가 힘이 생기는 사람을 말한다.
에스프레소코리아㈜의 정경석 대표가 그렇다. 에너지로 똘똘 뭉쳐 있어 함께 있으면 나도 모르게 기운이 충만해질 만큼 단단한 느낌을 가졌다. 타고난 스타일이 그렇다 보니 남들이 약은 계산으로 손익을 따질 때, 정 대표는 과감한 정면 돌파를 선택한다.
아무도 에스프레소커피를 생각하지 않을 때, 과감하게 뛰어들어 좌충우돌했던 것도 그런 성격 탓이다.
에스프레소코리아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도전적인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처음 사업을 시작했을 당시 수입한 원두의 맛이 기대했던 것과 너무 차이가 컸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입에 맞지 않는 커피가 다른 사람의 입맛을 충족시킬리 만무했다. 결국 처음 수입한 콩을 전량 폐기했다.
에스프레소 선진국에서 볶은 커피는 당연히 맛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처음 수입한 원두를 몽땅 버리고 사무실 베란다 한쪽에 로스터를 들여놓았다. 주변에서는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시 남들은 로스팅을 배우러 미국으로 일본으로 떠났지만 정 대표는 사무실 한쪽에서 직접 로스팅을 해가며 자신이 추구하는 맛을 찾는데 매달렸다. 에스프레소코리아의 시작이 그랬다. 무엇이든 안될 것이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불철주야 노력하는 것이 정 대표가 세상을 마주하는 방법이다.
모든 투자에는 리스크가 존재하듯 도전은 반드시 어느 정도의 무모함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성공은 이러한 도전의 열매로 찾아온다. 정 대표의 다음 도전은 커피의 메카로 알려진 미국 시애틀에 카페보니또를 오픈하는 것이다.
남들은 중국시장을 바라보며 중국 진출을 꿈꾸지만 정 대표는 남들과 다르게 미국 시애틀에서 스타벅스를 비롯한 세계적인 브랜드와 정면승부를 하겠다는 야심 찬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진행 중이다.
빠르면 올해 안에 시애틀에 매장이 문을 열 예정이다. 이를 위해 정경석 대표는 오늘도 분주한 하루를 보내는 중이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커피앤티> 2017년 06월호(185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커피라고는 믹스커피가 다인 줄 알던 시절, 카페라는 곳은 원두커피라 적힌 낯선 메뉴를 걸고 믹스커피와 다른 쓴 물을 비싸게 팔던 공간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초·중반, 커피전문점과 카페라는 공간은 소위 X세대라 불리던 당시의 젊은 층을 규정하는 문화적 상징이었으며, 지금과 같은 커피문화의 기반을 다진 초석이 되었다.
페미니즘이 문화 주류로 부상하고, 이에 편승한 여대생들의 흡연이 보편화 되면서, 당시 카페는 여성이 주변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흡연할 수 있던 유일한 공간이기도 했다. 사회 배경도 지금에 비하면 각박함이 덜했기에 카페는 낭만과 사랑을 이야기하던 젊은이들의 전유물이 되었다.
그러던 중 1999년 스타벅스가 이대 앞에 1호점을 내면서 우리나라의 카페와 커피문화는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에스프레소의 대중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에스프레소코리아 역시 ‘100년의 커피상점’이라는 슬로건을 걸고 세상에 첫선을 보였다.
에스프레소커피로서 국내 첫 브랜드가 탄생한 것이다. 당시 불모지나 다름없던 에스프레소 커피시장을 개척한 에스프레소코리아는 2011년 프렌차이즈 카페브랜드인 카페보니또를 론칭하면서 본격적인 오프라인 카페시장을 선도하기 시작했다.
이미 자리를 잡은 생두와 원두의 제조·유통 라인을 자신의 오프라인 매장에 직접 적용함으로써 카페보니또는 다른 어떤 카페 브랜드보다 경쟁력 있는 스페셜티커피 프렌차이즈로 성장해왔다.
세상을 향한 도전, 또 도전
사람을 나누는 흔한 방법으로 ‘주는 스타일’과 ‘빼앗는 스타일’로 구분 짓는 예가 있다. 주는 스타일은 에너지가 넘치고 매사에 긍정적이라 함께 있으면 주변 모두가 힘이 생기는 사람을 말한다.
에스프레소코리아㈜의 정경석 대표가 그렇다. 에너지로 똘똘 뭉쳐 있어 함께 있으면 나도 모르게 기운이 충만해질 만큼 단단한 느낌을 가졌다. 타고난 스타일이 그렇다 보니 남들이 약은 계산으로 손익을 따질 때, 정 대표는 과감한 정면 돌파를 선택한다.
아무도 에스프레소커피를 생각하지 않을 때, 과감하게 뛰어들어 좌충우돌했던 것도 그런 성격 탓이다.
에스프레소코리아의 탄생과 성장 과정을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도전적인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처음 사업을 시작했을 당시 수입한 원두의 맛이 기대했던 것과 너무 차이가 컸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입에 맞지 않는 커피가 다른 사람의 입맛을 충족시킬리 만무했다. 결국 처음 수입한 콩을 전량 폐기했다.
에스프레소 선진국에서 볶은 커피는 당연히 맛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그래서 처음 수입한 원두를 몽땅 버리고 사무실 베란다 한쪽에 로스터를 들여놓았다. 주변에서는 못마땅한 시선을 보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시 남들은 로스팅을 배우러 미국으로 일본으로 떠났지만 정 대표는 사무실 한쪽에서 직접 로스팅을 해가며 자신이 추구하는 맛을 찾는데 매달렸다. 에스프레소코리아의 시작이 그랬다. 무엇이든 안될 것이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불철주야 노력하는 것이 정 대표가 세상을 마주하는 방법이다.
모든 투자에는 리스크가 존재하듯 도전은 반드시 어느 정도의 무모함을 감수해야 한다. 그리고 성공은 이러한 도전의 열매로 찾아온다. 정 대표의 다음 도전은 커피의 메카로 알려진 미국 시애틀에 카페보니또를 오픈하는 것이다.
남들은 중국시장을 바라보며 중국 진출을 꿈꾸지만 정 대표는 남들과 다르게 미국 시애틀에서 스타벅스를 비롯한 세계적인 브랜드와 정면승부를 하겠다는 야심 찬 프로젝트를 계획하고 진행 중이다.
빠르면 올해 안에 시애틀에 매장이 문을 열 예정이다. 이를 위해 정경석 대표는 오늘도 분주한 하루를 보내는 중이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커피앤티> 2017년 06월호(185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